배우리 작가의 과학 단편소설 [내 서랍 속의 여자] ①

내가 이 작은 서랍장을 찾은 것은 오롯이 우연이었다. 영수와 작은 다툼이 있었고 우리는 항상 하던 대로 갈등을 묻어 버리기로 했다. 나는 티브이 앞 소파, 영수는 식탁 의자에 앉아 적막을 견뎠다. 내 배에서 냉전을 끝내는 배고픔의 고동 소리가 흘렀다.

그렇게 오늘의 갈등도 침묵 아래로 묻혔다. 그 결과, 영수는 저녁을 만들고 나는 그런 영수의 뒤에서 오늘 하루 있던 일을 말하며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가게 될까?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걸 없었던 일로 만들면서?

나는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중년 영수가 요리를 하며 등을 씰룩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지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건 포근하면서도 왠지 불안한 느낌이었다.

잠깐, 불안하다고? 얼굴을 찌푸리고 영수와 헤어진 후를 상상해 봤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미 영수는 내 삶의 일부였다. 우리는 높은 확률로 계속 함께할 거다. 대부분은 유쾌하게 지내면서, 그리고 가끔은 오늘처럼 갈등을 없던 일로 만들면서.

그 미래는 분명 행복할 거라고 되뇌면서도 난 생각이 복잡할 때나 하는 행동을 했다. 생전 하지 않는 청소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빙빙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옷을 정리했고 집안 구석에 방치된 물건을 집어 들어 빈 곳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언제나 과포화 상태기 때문에 물건을 처리할 자리가 부족했다. 베란다 밖에 있는 창고가 생각난 것도 그때였다.

베란다 밖으로 나와 창고 문을 열자, 아래 칸에 놓인 서랍장이 눈에 띄었다. 원래는 상아색이었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볼품없는 서랍장이었다. 사무실 책상 밑에 두기 좋은 규격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매한 기억이 없었다. 집주인 아주머니나 이전 세입자가 놓고 간 것도 아닌 게,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창고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한 기억이 선명했다.


이 글은 산수야 출판사에서 출간한 ‘대한민국 과학 소재 스토리 공모전 수상작품집 2023’에 실린 배우리 작가의 [내 서랍 속의 여자]를 참고하였습니다. 복제와 무단 전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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